1947년, 전문 무용수를 위한 토슈즈 제작업체로 시작한 레페토는 자체 기술과 춤에 대한 감성적 이해를 바탕으로 패션 플랫 슈즈 ‘상드리용’을 탄생시켰다. 위기 속에서도 브랜드 본연의 정체성을 지켜내며 명성을 이어나간 그들의 이야기를 살펴본다.

발레라는 DNA를 성공적으로 이식한 레페토의 첫 패션 슈즈
레페토는 1947년 로즈 레페토 Rose Repetto가 무용수인 아들 롤랑 프티 Roland Petit를 위해 토슈즈를 만들면서 시작했다. 몽마르트르에서 카페를 경영하던 로즈 레페토는 신발에 대한 전문 지식도, 무용을 배워본 경험도 없는 사람이었다. 단지 좀 더 편안한 토슈즈를 찾는 아들의 발을 만족시킬 제품을 만들겠다는 생각이었다. 이들의 작업장은 파리의 뤼드라페에 자리했는데, 이곳은 레페토를 설립하기 전부터 까르띠에 Cartier 등의 명품 브랜드 매장과 공방이 있던 지역이었다. 레페토 작업장에선 당대 최고의 무용수를 위한 토슈즈를 만들었다. 창업 후 30년 동안 큰 재정적 위기를 겪지 않은 것도 무용계 인사들과 친분이 두터웠기에 가능했다. 최고의 무용수들과 직접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며 무용의 시대적 흐름을 토슈즈 제작에 반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용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함께 기술적 완성도 또한 레페토의 성공에 큰 몫을 했다. 레페토의 토슈즈는 기존의 다른 토슈즈보다 가볍고 유연해 무용수의 움직임을 좀 더 자유롭게 만들었다. 또 디자인 면에서도 기술에 걸맞은 우아함을 갖추고 있었다. 패션 슈즈로 제품군을 확장한 것도 무용계에서의 명성을 기반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자갈로 포장된 길에서도 신을 수 있는 발레 슈즈를 만들어달라는 발레리나 출신의 유명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 Brigitte Bardot의 요청을 받아들여 만든 신발이 현재 레페토의 아이콘이 된 상드리용 모델이다. 늘 무용수의 움직임과 발에서 영감을 얻은 그녀는 이 일상화를 토슈즈의 연장으로 보았다. 토슈즈의 유연함을 그대로 신발 구조에 적용해 일반인은 물론 무용수 역시 편하게 신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레페토 신발은 기존 무용수 고객을 잃지 않으면서도 패션 슈즈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고, 이는 탄탄한 팬덤을 형성하는 뿌리가 됐다.

위기를 극복하고 맞은 제2의 전성기
발레리나 슈즈로 불리는 상드리용 모델은 레페토의 ‘위대한 유산’이다. 1959년 뤼드라페 지역에 오픈한 레페토의 첫 매장엔 ‘브리지트 바르도의 신발’을 구매하려는 고객이 몰려들었고, 레페토는 순식간에 유명 셀러브리티와 패션계 인사들이 주목하는 브랜드가 됐다. 로즈 레페토는 상드리용 모델의 인기를 등에 업고 ‘지지’라는 두 번째 유산을 만들었다. 1970년에 론칭한 지지는 재즈화 형태의 끈이 달린 플랫 슈즈로, 발레리나 이미지가 강한 브랜드에 남성성을 불어넣은 아이템이었다. 이러한 유산들로 큰 탈 없이 성장해나갈 것만 같던 레페토에도 위기는 닥쳐왔다. 레페토의 명성이 흔들린 건 1984년, 브랜드의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는 로즈 레페토가 사망하면서부터다. 아들 롤랑 프티는 적재적소에 레페토다운 아이템을 선보인 어머니의 사업적 재능을 이어가지 못했다. 레페토의 고객 리스트를 채우던 유명 배우와 무용수들은 특유의 감각을 잃어버린 브랜드에 등을 돌렸고, 자연스레 대중의 관심도 멀어졌다. 그때 구원투수처럼 등장한 이가 바로 현재 CEO인 장마르크 고셰 Jean-Marc Gaucher다. 그는 매년 152만 유로 (약 10억원)의 적자를 내던 브랜드를 서슴없이 인수하고 브랜드 회생 작업에 돌입했다. 그는 일본 브랜드 이세이 미야케가 추구하는 조형적 미학이 발레를 중심으로 한 레페토와 훌륭한 조화를 이룬다고 판단했으며, 충분히 아시아 시장을 공략할 수 있다고 봤다. 레페토가 이세이 미야케를 위해 만든 플랫 슈즈는 이세이 미야케 매장에서 독점 판매하며 패션업계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레페토의 일반 모델까지 재주목받는 효과를 가져왔다. 장마르크 고셰는 이 기세를 몰아 요지 야마모토, 꼼데가르송과 협업을 이어나갔다. 또 노년층을  주 고객으로 둔 유통 판로를 과감히 정리하고 하이패션 브랜드와 같은 진열대에 오르도록 했다.

 

발레리나들은 고된 공연 일정을 마치고 나면 일반인의 발에 맞게 제작한 일상화를 바로 신지 못하고 길들이는 과정이 필요했는데, 레페토의 발레리나 슈즈는 그 힘든 과정을 덜어주었다. 결국 레페토 신발은 기존 무용수 고객을 잃지 않으면서도 패션 슈즈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고, 이는 탄탄한 팬덤을 형성하는 뿌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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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 슈즈 시장의 포화 상태에서 지켜낸 정체성
레페토는 2000년대 초반부터 계속된 플랫 슈즈의 전성기를 이끈 대표 브랜드다. 레페토의 매출은 2004년부터 급격하게 상승해 2006년엔 2340만 달러(약 252억원)를 기록했고, 해마다 10% 이상의 신장을 거듭해왔다. 레페토가 경쟁력을 갖는 이유는 플랫 슈즈를 전문으로 다루는 캐릭터 슈즈 브랜드임에도 그 안에서 계속 확장을 꾀하기 때문이다. 대표 모델인 상드리용, 지지, 마이클 외에도 탱고 슈즈에서 영감을 받은 T-스트랩 슈즈와 무용수의 연습 가방에서 영감을 받은 핸드백, 발레복의 컬러와 실루엣을 닮은 일상복까지 레페토의 이름을 달고 판매한다. 춤과 패션을 현명하게 접목한 제품 라인은 브랜드의 정체성을 또렷하게 각인시킨다. 대신 레페토는 제품 출시 전략에서 조금 더 개방적이고 유연한 태도를 취한다. 예를 들면 적어도 1년에 여섯 번은 새로운 컬렉션을 선보이는 것이다. 매장을 자주 방문하는 단골 고객을 확보 · 유지하기 위한 보상 차원의 전략인 셈이다. 현재 레페토는 더 많은 잠재 고객에게 브랜드를 노출하기 위해 단독 매장은 물론 면세점 매장을 확대하는 데도 적극 나서고 있다.

브랜드의 근본을 유지하기 위한 의지와 노력
CEO 장마르크 고셰가 이야기하는 브랜드의 중심, 본연의 모습은 무용과 무용수들이다. 이는 신발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곧 제품의 유용성과 맞닿은 이야기다. 레페토는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공방이나 장인에 대해 어필하지 않지만, 브랜드를 시작한 1947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자국 내 생산을 유지해왔다. 레페토의 공장은 프랑스 도르도뉴 Dordogne 지방에 위치해 있으며, 이곳에서 신발 전량을 만들어낸다. 이는 창립자 로즈 레페토가 늘 강조하던 ‘완벽한 품질의 신발’을  위해서다. 로즈 레페토가 토슈즈를 제작하며 개발한 스티치 앤드 리턴 stitch and return 공법은 아직까지도 레페토의 모든 플랫 슈즈를 만드는 데 적용하고 있다. 이는 신발에 탁월한 착화감과 유연성을 부여해 신발을 신었어도 맨발인 것처럼 느끼게 한다. 모든 박음질이 신발 안쪽에서 이루어지므로 신발 외부에는 어떠한 박음질 자국도 보이지 않으며, 밑창 두께의 절반 이상을 감춰 특유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다. 레페토가 일상화 제작과 관련한 기술혁신에 꾸준히 에너지를 쏟을 수 있는 것은 창업 이후 부터 계속해 온 토슈즈 생산 덕분이다. 급기야 레페토는 2005년, 프랑스 콩피에뉴 공과대학 University of Technology of Compiègne과 손잡고 방음형 토슈즈 개발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연구를 통해 완성한 토슈즈는  기존 토슈즈에 비해 61%의 소음이 감소했으며, 무용수들의 고통도 격감해주었다. 덕분에 레페토의 토슈즈를 찾는 전문 무용수가 늘어났고, 착화감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기존의 레페토 토슈즈를 외면한 이들까지 레페토의 고객이 됐다. 토슈즈 생산은 레페토 공장이 위치한 지역 내 독립적 공간에서 별도로 이루어지며, 토슈즈 제작 노하우는 고스란히 일반 플랫 슈즈에 이식된다. 트렌드의 광풍 속에서도 레페토가 유유히 그들의 행보를 계속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원형에서 해답을 찾기 때문일 것이다.

 

Hernando A. Navarrette

Richard Buxton

Repetto
Issue No. 24

Repet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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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플랫 슈즈 브랜드 레페토는 1947년 로즈 레페토가 뛰어난 발레리노이던 아들 롤랑 프티의 조언으로 토슈즈를 만들며 탄생했습니다. 특유의 제작 방식은 이후 그 효용성을 레페토의 일상화 라인에 담아내는 초석이 되었습니다. 1980년대 중반, 창업자의 죽음은 브랜드의 침체기를 가져왔지만, 새로운 CEO 장마르크 고셰는 브랜드의 정체성인 ‘무용’을 기반으로 패션과 접목하며 레페토에 다시금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습니다.